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문단 편집) ====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 이후 ==== 그러나 이런 표면상의 우호관계는 키케로가 상류 사회의 여론을 염두에 두고 우티카에서 자결한 카토를 찬양하는 내용을 담은 책을 집필하고 뒤늦게 그 소식을 접한 카이사르가 키케로의 주장에 반박하기 위해 직접 카토를 비난하는 내용의 책을 집필하는 일이 일어나면서 급격히 냉각하고, 키케로는 정계에서 멀어져 저술 활동에 전념한다. 한편 기원전 46년 10년 기한의 독재관에 취임한 카이사르는 기원전 44년 자신의 지지자 삼백여 명[* 여기엔 속주 출신 인사가 얼마간 포함돼 있었는데, 이 사실은 사회 전반적으로 속주민을 멸시하는 풍조가 만연했던 당대 로마의 사정상 많은 이들의 공분을 사 카이사르 암살이 거행되는 데 일조한다. 키케로도 사정은 다르지 않아 원로원이 더럽혀졌다며 카이사르를 비난한다.]을 원로원 의원으로 만들고 이들의 지지를 발판삼아 종신 독재관이 된다. 이에 카이사르가 최고권력자 자리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다고 판단한 [[마르쿠스 브루투스|브루투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카시우스]]를 위시한 적지 않은 수의 인사들은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를 암살한 뒤 키케로와 접촉한다. 키케로는 암살에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이들의 호출 이후 다시금 로마 정계의 핵으로 부상하게 되는데 이는 공식 석상에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해 줄 수 있는 명성과 언변을 갖춘 정치인은 그뿐이었기 때문이다[* 마르쿠스 브루투스 역시 명망을 지닌 당대 로마에서 손꼽히는 웅변가였으나 카이사르 모살자 혹은 해방자들의 간판격 존재이기도 했으므로 이 시점 그에게 허용된 운신의 폭은 한정적이었다.]. 하지만 카이사르를 암살한 소위 공화파 인사들과 키케로에겐 그들의 명분을 뒷받침해줄 힘이 부족했으며, 로마인들은 전쟁영웅이자 전부터 여러 방면에서 자신들의 권익을 옹호해온 카이사르에게 우호적이었다. 다시 말해, 대다수 로마 시민은 소위 공화파 인사들이 내건 명분에 거의 공감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키케로나 카이사르 모살자들이 사태의 주도권을 장악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이를 증명하듯 안토니우스의 주도하에 카이사르파와 공화파 사이의 타협이 이루어진 것도 잠시, 이내 공화파 인사들은 여론과 상황에 떠밀리듯 로마를 떠나야 했다. 상황이 악화되자 키케로는 카이사르 모살자들이 안토니우스도 함께 제거하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했으나, 이 일은 도리어 키케로의 정치적 안목이 후대에까지 자자한 명성에 미치지 못함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카이사르 암살은 참주 살해라는 명분하에 결행됐으며 그렇기에 부분적이나마 카이사르파에 속한 인사들에게서도 공감대를 끌어내 카이사르파와 카이사르 모살자들 사이의 타협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반면 키케로의 말처럼 카이사르를 넘어 안토니우스까지 제거되었다면 이 일은 카이사르파 전체에 대한 공세로 여겨졌을 가능성이 농후하므로 암살자들을 기다리는 것은 타협의 가능성이 아니라 카이사르파의 즉각적인 반격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일례로 카이사르 암살 소식을 접한 뒤 군대를 거느리고 로마 시내로 진입한 카이사르파 인사 레피두스의 움직임을 멈춰세운 것은 안토니우스와의 만남이었다.]. 그러나 워낙 다채로운 인사들의 연합이었던 카이사르파는 카이사르가 존재했기에 하나로 결집한 세력이었으며, 구심점인 카이사르가 사라지자 급속히 결집력을 잃고 와해된다. 안토니우스는 당년도 집정관이란 지위를 이용해 자신의 세를 불리는 등 그럭저럭 정국을 주도해나갔으나 혼란을 완전히 가라앉히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으며, 이 와중에 카이사르의 유산상속자로 지명된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에 입성하였고 이로 인해 또다른 풍랑이 몰아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